자동차를 오래 사용하다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생기게 마련이다. 복잡한 도로 위에서 갑자기 차가 멈추었을 때의 당혹감이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이때 할 일이란 기껏 보험사에 연락해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것 말고 뭐가 있을까.
집에선 아침까지 멀쩡하던 전등이 들어오지 않을지 모른다. 여러분은 남편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던 마누라의 성화를 멋지게 수습하는 편인가. 그렇지 않다면 머리 긁적이며 수리할 사람을 불러 비싼 인건비 지출에 마누라의 잔소리까지 덤터기로 듣는 편인가?
이때 쓸 만한 공구 하나만 있으면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수습될지도 모른다. 똑같은 경우를 당했던 미국의 청년 기술자 팀 레더맨(Tim Leatherman)은 1983년 자신의 손재주를 살려 언제 어디서나 쉽게 휴대해 쓸 수 있는 만능 공구를 만들어냈다. 사소한 동기에서 출발한 레더맨은 사용자 입장에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었다.

레더맨은 손잡이만 펼치면 각개의 도구들이 드러난다.
팀 레더맨은 자신의 간단한 아이디어를 제품화하기까지 7년을 소비했다. 각 기능의 배치와 수납공간 확보, 강도 높은 재질을 선택하기 위해 들인 노력은 집념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결과만을 보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면엔 한 인간의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독한 연구과정이 담겨 있다. 무엇인가 만들어내는 일은 고통을 먹고 자라는 생존의 메커니즘과 하등 다를 게 없다.
비상공구 하면 유명한 빅토리녹스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빅토리녹스는 정교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무엇 하나 빠지는 부분이 없는 높은 완성도는 최고의 물건으로 손색없다. 하지만 실제 사용해보면 아쉬운 부분이 많다.
칼과 톱, 가위 위주의 도구를 모은 빅토리녹스는 야외생활용품 성격이 짙다. 주된 쓰임이 임시 대처이다. 이에 비하면 레더맨은 칼과 톱 이외 일상생활에서 쓰임이 훨씬 많은 펜치나 플라이어 같은 유용한 기능을 더해놓았다. 우리가 평소 볼트와 너트로 조립된 기계와 전자기기를 더 많이 사용하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손잡이를 펼치기 전의 레더맨
빅토리녹스와 달리 레더맨은 손잡이만 펼치면 각개의 도구들이 드러난다. 좁은 틈새를 비집고 필요한 기능을 꺼내지 않아도 되는 레더맨의 편리함과 현장 대응력이 두드러지는 이유다. 레더맨 역시 빅토리녹스 사용자였다. 그를 뛰어넘는 노력과 기능이 없었다면 레더맨의 디자인은 실패 사례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레더맨에 담긴 각 기능들은 본격 도구로서도 충분히 역할을 한다. 도톰한 칼날의 두께와 예리함은 육류와 생선을 훨씬 수월하게 잘라준다. 게다가 여유 있는 길이의 톱날은 톱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한다.
주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산속에서 혼자 촬영하는 경우가 많다. 사소해 보이는 기재 고장은 의외의 복병이 되어 난감한 경우를 만든다. 이때 레더맨의 활약이 시작된다. 나사가 풀려 흘러내리는 삼각대 너트쯤은 펜치로 조여 해결한다. 간단한 도구의 존재는 속수무책의 난감함 대신 해결 방법이 되어 먹고 사는 일과 이어진다.
자동차 보닛을 열어 끊긴 전선과 나사를 잇고 조이면 멈춰진 에어컨은 흰 성에를 내뿜으며 작동된다. 추위보다 참기 어려운 아스팔트의 열기는 이내 쾌적함으로 돌아와 모두를 기쁘게 했다. 20년 넘게 세상을 돌아다니며 레더맨 신세 진 얘기를 풀어놓자면 하루 저녁도 모자란다.
레더맨은 야외생활과 소소한 작업 현장의 예기치 못한 상황을 반전시키는 재주가 넘친다. 올리브에겐 뽀빠이, 내겐 레더맨이란 흑기사가 있다. 도움이 필요할 때 주머니 속 레더맨은 변신합체 로봇이 되어 해결사 역할을 한다.
나비효과는 개인의 삶에도 적용된다. 사소한 사건은 일파만파의 위력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예상되는 위험은 대처 방법을 찾아야 더 큰 파급을 막는다. 살면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할 상황이 많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차이가 크다. 이젠 레더맨 없는 여행과 야외 작업은 하지 않는다. 주머니 속 든든한 ‘빽’의 권능을 확인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