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우리나라에 귀화하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 초엽이며, 그때는 주로 수(隋), 당(唐)의 중국인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송(宋)나라 사람을 비롯하여 몽골계, 여진계, 위구르계, 아랍계, 베트남계, 일본계 등의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귀화(歸化)했다.,
①정치적 망명 혹은 유배로 귀화한 사람. ②항해 도중에 풍랑으로 표착(漂着)하여 귀화한 사람. ③전쟁이나 내란으로 피란 왔다가 전란 중에 귀화한 사람. ④국가간의 왕실 시종관계(侍從關係)로 따라 왔다가 귀화한 사람. ⑤고려 말엽에 역대 왕이 원(元)의 공주를 왕비로 삼게되면서 그들을 수행해왔다가 귀화한 사람,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것이든 대체로 중국의 왕조 교체기에 집중적으로 귀화하고 있다. 광주노(盧)씨. 함열여(呂)씨. 평택임(林)씨. 면천복(卜)씨 등은 당말(唐末) 혹은 당이 망하고 송(宋)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기까지의 이른바 후5대(後五代: 10세기) 때 귀화한 것으로 전한다. 반면, 함종어(魚)씨. 신안주(朱)씨. 충주지(池)씨. 달성빈(賓)씨. 서산정(鄭)씨. 거창장(章)씨. 황주변(邊)씨 등은 여진족인 금(金)나라가 중원을 석권하던 남송(南宋)시대, 혹은 몽고족이 금과 남송을 공략하여 중원을 휩쓸었던 12~13세기에 귀화한 것으로 전한다. 또 밀양당(唐)씨. 아산장(蔣)씨. 청해이(李)씨 등은 몽고족인 원(元)이 명(明)의 핍박을 받아 북쪽으로 밀려나던 14세기 후엽에 귀화했는가 하면, 17세기 초엽 후금(後金)에 의해 명(明)이 멸망하던 무렵에는 많은 명인(明人)이 귀화했다. 이밖에 진주사(謝)씨. 요양자(慈)씨. 대구빈(彬)씨. 광주모(毛)씨. 예산연(連)씨. 하남정(程)씨 등은 조선조 말기 이후에 귀화한 것으로 전한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귀화한 동기를 예로 들어보면,
우리나라황씨의 도시조인 황락(黃珞)은 원래 중국 후한의 유신(儒臣)이었는데, 그가 한나라 광무제 건무 4년(신라 유리왕 5년=28)에 교지국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평해에 표착(漂着)하여 그곳에 자리잡고 살게 되었다.그의 아들 갑고. 을고. 병고가 각각 평해.장수.창원황씨의 원조(遠祖)다. (중국계) 연안이씨(延安李氏) 당(唐) 고종 때의 사람인 이무(李茂)는 660년 당군이 신라와 동맹하여 백제를 침공할때 소정방의 휘하로 참전했다가 귀국치 않고 신라에 귀화, 연안백에 봉해졌으며, 그 원손(遠孫)이 연안을 본관으로 삼았다. (중국계) 옥천육씨(沃川陸씨) 중국 절강성 소헌부 사람인 육보(陸普)가 후당 천성 2년(신라 경순왕 원년=927)에 8학사의 한 사람으로 신라에 파견되어 왔다가 경순왕의 부마가 되고 관성군에 봉해졌다. 관성은 옥천의 고호이다. 이로부터 그의 자손들이 충북 옥천땅에 세거하게 되었는데, 지금도 관성군의 묘는 옥천 화인리 뒷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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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계) 연안인씨(延安印氏) 시조 인후(印侯)는 '고려사'에 의하면 그는 몽골사람으로 원래 이름은 '후라타이'이다. 1275년(고려 충렬왕 1년) 충렬왕비인 원나라 황녀 제국공주를 따라 우리나라에 들어와 귀화하여 1309년(충선왕 1) 평양군으로 봉해지고 자의도첨의사사가 되었으며 검교정승을 지냈다. 아들 인승단(承旦)이 충목왕 때 좌정승으로 연안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연안으로 하였다. (여진계) 청해인씨(靑海李氏) 시조 이지란(李之蘭)은 "황송통보(皇宋統譜)"에 의하면 중국 남송의 충신이며 당대의 명장 악비(岳飛)의 다섯째 아들 정(霆)의 6세손이다. (위구르계) 경주설씨(慶州偰氏) 시조 설손(偰遜, 호는 근사재)은 원래 회골(위그르)사람이다. 조상이 설연하에 대대로살아서 성을 설이라고 했다고 하며 태전 설극직의 8대손이라고 한다. 설손은 원나라에 귀화하여 단주태수 벼슬을 지냈으며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난 시인이다. 그가 상을 당하여 대령(大寧)에 가있었는데 1358년(고려 공민왕 7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귀화자 공민왕이 그를 대접하여 부원후에 봉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설장수(시호는 문정)가 경주로 본관을 하사 받아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 (아랍계) 덕수장씨(德水張氏) 시조 장백창(張伯昌, 일명 장순용, 시호는 공숙)은 아랍(이슬람)계 사람으로 원나라 세조 때 필도치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1275년(고려 충렬왕 1년) 충렬왕비인 제국공주를 배행하여 고려에 왔다가 덕수현에 살면서 금자광록대부, 문하찬성사를 지내고 덕수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덕수현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덕수를 본관으로 하였다. (베트남계) 화산이씨(花山李氏) 13세기 초 고려 고종 때 안남국(安南國. 현 베트남)의 왕 이천조(李天祚)가 트란 왕조에게 권력을 빼앗기자 둘째 왕자 이용상(李龍祥)이 1226년(고려 고종 13년) 배를 타고 지금의 황해도 옹진군 화산으로 피난왔다. 이를 들은 고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화산군에 봉하고 그 곳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일본계) 우록김씨(友鹿金氏: 賜姓 金海金氏) 문헌에 전하는 일본계의 귀화인으로는 사성김해김씨(賜姓金海金氏)인 충선(忠善)이 있다. 그의 본명은 사야가(沙也可)로서 1592년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의 좌선봉장이 되어 3천의 군사를 이끌고 내침했다가 조선의 문물과 인정풍속을 흠모한 끝에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귀부(歸附)하여 귀화인이 되었다. 뒤에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종2품인 가선대부에 오르고 도원수 권율 등의 주청에 의해 김충선(金忠善)이란 성명과 김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병자호란 이후 달성군 우록동(友鹿동)으로 은퇴하여 살았다.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하여 5남1녀를 낳고 72세로 죽었다. 그의 후손은 15대에 이르고 경북 달성군 가창면 우록동에 많이 살고 있어 우록김씨(友鹿金氏)라고도 불린다. 발해의 유민(遺民) "고려사"에 맨 먼저 등장하는 귀화인은 발해국의 세자 대광현(大光顯)을 비롯한 유민들이다. 발해는 고려가 건국된 직후인 태조 9년(926)에 글안(契丹)에게 멸망했는데. 이때를 전후해서 많은 발해의 유신과 유민이 잇달아 고려에 망명, 귀화했다. 이 무렵에 투하해 온 발해인 은 전후 수만 호(數萬戶)에 이르는데, 발해의 왕족인 대씨(大氏)만도 대광현을 비롯하여 대화균. 대유범. 대원균. 대복예. 대심리 등의 이름이 보이고, 이밖에도 박어. 오흥. 김신. 신덕. 은계종. 홍견. 정근. 진림. 박승 등의 이름이 있는데, 이들은 대개 발해국의 지배층이었던 신료로 생각된다. 몽고계와 아압계 및 위구르계 원나라에 복속되었던 고려 말엽에는 귀화인도 그 양상을 달리한다. 1232ㄴ녀(고종 18년)에서 1257년 까지 무려 27년 동안에 걸쳐 일곱 차례나 몽고의 치밉을 겪은 고려는, 1270년(원종2년), 전란 중에 강화로 옮겼던 수도를 개경으로 다시 환도하게 되면서부터 원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13세기 중엽에서 14세기 중엽에 이르는 약 100년 동안 원의 적극적인 간섭을 받아 고려의 역대 왕(王)은 원의 공주를 정비(正妃)로 삼았으며, 왕자는 볼모로서 원의 수도인 북경에 가서 머물러 있다가 원제(元帝)의 부마(駙馬)로서 고려의 왕위를 계승하게끔 되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충혜왕.충목왕.충정왕.공민왕이 곧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충선왕. 충숙왕.충목왕은 몽고 여인에게서 태어난 왕이었다. 그런데, 원대(元代)의 귀화성씨들이 대개 이 무렵에 원의 공주를 따라 들어온 사람들이다. 이 당시이 귀화성씨 중 청주양(楊)씨. 풍천임(任)씨. 덕수장(張)씨. 연안인(印)씨. 곡산(連)씨 등의 시조는 충렬왕비인 제국공주(齊國公主:원 세조 쿠빌라이 딸)를 따라온 것으로 되어있고, 원주변(邊)씨. 창원황(黃:石奇)씨. 개성로(路)씨. 개성용(龍)씨. 창원공(孔:曲阜)씨. 안음서문(西門)씨 등의 시조는 공민왕비인 노국공주(원 魏王의 딸)를 따라온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려사"에 보면 충렬왕 3년(1277)에, 제국공주를 따라온 겁령구(怯怜口: 私屬人) 들에게 성명을 내려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즉 홀라대는 인후(印候)로, 삼가(三哥)는 장순룡(張舜龍)으로, 식독아(式篤兒)는 노영(盧英)으로, 오십팔(五十八)은 정공(鄭公)으로 사성명(賜姓名)하고 각각 장군 혹은 중랑장에 임명한 것이다. 이들은 공주(忠烈王妃)의 측근에서 국내정치에도 적극 참여하게 되는데, 그중 인후(印候)는몽고인으로서 연안인씨(延安印氏)의 시조이며, 장순룡은 아라비아(아랍계: 서역大食國) 사람으로 덕수장씨(德水張氏)의 시조가 된다. 뒷날인 공민왕 7년(1358)에 설손(偰孫)이란 사람이 고려에 귀화하는데 그는 위구르 사람이다. 또 이 무렵에 귀화하여 통역을 맡은 이현(李玄)도 위구르 사람이다.이들 중 설손은 경주설씨(慶州偰氏)의 시조이며, 이현은 임천이씨(林川李氏)의 시조가 된다. 오늘날 족보상에 나타나 있는 귀화성씨 가운데 상당수는 정사(正史)나 야사(野史)에 귀화(歸化)한 성씨임이 밝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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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ujuhim.co.kr/main51-14.htm